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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의 주요 업적 정리

강빵e 2025.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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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의 주요 업적 정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은 조선 후기 고종의 아버지로, 1863~1873년(10년간) 섭정하며 조선을 개혁하려 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의 폐해, 재정난, 외세 침략 위협 등으로 혼란스러웠고,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개혁과 쇄국정책을 추진했습니다.


📌 1. 정치 개혁: 세도정치 철폐

세도정치 척결 → 왕권 강화

  • 안동 김씨 등 외척 세력의 권력 독점을 막기 위해 비변사 폐지 & 인사 개혁
  • 삼정(三政) 문란을 바로잡아 부정부패 줄이기

비변사(備邊司) 폐지

  • 비변사는 조선 후기 국정 운영을 담당했지만, 세도 정치의 중심이 되었음
  • 흥선대원군은 이를 폐지하고 의정부 & 삼군부 기능을 복원하여 국왕 중심 체제 강화

📌 2. 경제 개혁: 경복궁 중건 & 원납전 징수

경복궁 중건(1865~1867)

  • 임진왜란 이후 방치된 경복궁을 재건하여 왕권 상징 강화
  • 원납전(願納錢) 강제 징수 → 백성들에게 많은 부담을 줌
  • 당백전(當百錢) 발행 → 심각한 물가 상승 초래

호포제(戶布制) 시행 (양반도 세금 부담)

  • 기존에는 양반이 면세였지만, 모든 가구가 군포(軍布)를 내도록 개혁
  • 양반들의 반발을 샀으나, 국가 재정 개선 효과

사창제(社倉制) 실시 (환곡제 개혁)

  • 기존 환곡(官倉 대출제도)의 부정부패가 심각
  • 지역 단위(마을)에서 곡식을 관리하는 사창제 도입하여 백성 부담 완화

📌 3. 대외 정책: 쇄국정책 & 천주교 탄압

강력한 쇄국정책 (통상수교 거부정책)

  • 서양의 무역 요구를 강하게 거절하며 "척화비(斥和碑)" 건립
    "서양 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에서 프랑스 & 미국 격퇴

천주교 탄압 (병인박해, 1866)

  • 조선 후기 천주교가 확산되며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
  • 프랑스 선교사 포함 8,000여 명 처형 → 병인양요(프랑스 침략) 원인

병인양요(1866) 프랑스 격퇴

  •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했지만, 양헌수 장군이 정족산성에서 승리

신미양요(1871) 미국 격퇴

  •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을 구실로 강화도를 공격
  • 어재연 장군이 광성보에서 저항했으나 패배 → 외규장각 도서 약탈

📌 4. 실각과 이후 행보

✔ 1873년 고종이 친정(직접 통치) 선언 → 흥선대원군 실각
민씨 정권 등장 (명성황후 세력 확대)
✔ 1882년 임오군란 때 재집권 → 청나라 개입으로 다시 실각
✔ 1894년 갑오개혁 때 일본에 의해 납치 & 강제 퇴출


🎯 흥선대원군의 업적 정리 (장점 vs 단점)

업적 긍정적 영향 부정적 영향

세도정치 철폐 부정부패 줄이고 왕권 강화 지나친 독재로 반발 초래
경복궁 중건 왕실 권위 회복 백성 착취 심화 (원납전 강제 징수)
호포제 시행 양반 특권 줄이고 국가 재정 확충 양반층 반발로 갈등 심화
사창제 도입 백성 부담 줄이고 공정한 곡식 대출 일부 지역에서 효과 미흡
쇄국정책 강화 외세 침략 저지 서양 문물 유입 차단으로 근대화 지연
병인양요 & 신미양요 대응 프랑스 & 미국 격퇴 외규장각 도서 약탈당함
천주교 탄압 (병인박해) 왕권 강화 시도 프랑스 보복 공격(병인양요)

📌 결론: 흥선대원군의 역사적 평가

긍정적 측면:

  • 세도정치 철폐 & 개혁 추진 → 조선 왕권 강화
  • 자주적 국방 & 외세 침략 방어 → 병인양요 & 신미양요 승리
  • 호포제 & 사창제 개혁 → 조세 형평성 증가

부정적 측면:

  • 지나친 독재 & 강제 정책 → 민심 악화
  • 쇄국정책으로 근대화 지연 → 일본과의 힘 차이 확대
  • 경복궁 중건 부담 & 경제 악화 → 백성 착취 심화

💡 흥선대원군은 개혁적인 인물이지만, 근대화를 준비하지 못해 조선이 일본과 서구 열강에 뒤처지게 된 원인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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