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선대원군의 주요 업적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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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의 주요 업적 정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은 조선 후기 고종의 아버지로, 1863~1873년(10년간) 섭정하며 조선을 개혁하려 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의 폐해, 재정난, 외세 침략 위협 등으로 혼란스러웠고,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개혁과 쇄국정책을 추진했습니다.
📌 1. 정치 개혁: 세도정치 철폐
✔ 세도정치 척결 → 왕권 강화
- 안동 김씨 등 외척 세력의 권력 독점을 막기 위해 비변사 폐지 & 인사 개혁
- 삼정(三政) 문란을 바로잡아 부정부패 줄이기
✔ 비변사(備邊司) 폐지
- 비변사는 조선 후기 국정 운영을 담당했지만, 세도 정치의 중심이 되었음
- 흥선대원군은 이를 폐지하고 의정부 & 삼군부 기능을 복원하여 국왕 중심 체제 강화
📌 2. 경제 개혁: 경복궁 중건 & 원납전 징수
✔ 경복궁 중건(1865~1867)
- 임진왜란 이후 방치된 경복궁을 재건하여 왕권 상징 강화
- 원납전(願納錢) 강제 징수 → 백성들에게 많은 부담을 줌
- 당백전(當百錢) 발행 → 심각한 물가 상승 초래
✔ 호포제(戶布制) 시행 (양반도 세금 부담)
- 기존에는 양반이 면세였지만, 모든 가구가 군포(軍布)를 내도록 개혁
- 양반들의 반발을 샀으나, 국가 재정 개선 효과
✔ 사창제(社倉制) 실시 (환곡제 개혁)
- 기존 환곡(官倉 대출제도)의 부정부패가 심각
- 지역 단위(마을)에서 곡식을 관리하는 사창제 도입하여 백성 부담 완화
📌 3. 대외 정책: 쇄국정책 & 천주교 탄압
✔ 강력한 쇄국정책 (통상수교 거부정책)
- 서양의 무역 요구를 강하게 거절하며 "척화비(斥和碑)" 건립
→ "서양 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에서 프랑스 & 미국 격퇴
✔ 천주교 탄압 (병인박해, 1866)
- 조선 후기 천주교가 확산되며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
- 프랑스 선교사 포함 8,000여 명 처형 → 병인양요(프랑스 침략) 원인
✔ 병인양요(1866) 프랑스 격퇴
-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했지만, 양헌수 장군이 정족산성에서 승리
✔ 신미양요(1871) 미국 격퇴
-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을 구실로 강화도를 공격
- 어재연 장군이 광성보에서 저항했으나 패배 → 외규장각 도서 약탈
📌 4. 실각과 이후 행보
✔ 1873년 고종이 친정(직접 통치) 선언 → 흥선대원군 실각
✔ 민씨 정권 등장 (명성황후 세력 확대)
✔ 1882년 임오군란 때 재집권 → 청나라 개입으로 다시 실각
✔ 1894년 갑오개혁 때 일본에 의해 납치 & 강제 퇴출
🎯 흥선대원군의 업적 정리 (장점 vs 단점)
업적 긍정적 영향 부정적 영향
세도정치 철폐 | 부정부패 줄이고 왕권 강화 | 지나친 독재로 반발 초래 |
경복궁 중건 | 왕실 권위 회복 | 백성 착취 심화 (원납전 강제 징수) |
호포제 시행 | 양반 특권 줄이고 국가 재정 확충 | 양반층 반발로 갈등 심화 |
사창제 도입 | 백성 부담 줄이고 공정한 곡식 대출 | 일부 지역에서 효과 미흡 |
쇄국정책 강화 | 외세 침략 저지 | 서양 문물 유입 차단으로 근대화 지연 |
병인양요 & 신미양요 대응 | 프랑스 & 미국 격퇴 | 외규장각 도서 약탈당함 |
천주교 탄압 (병인박해) | 왕권 강화 시도 | 프랑스 보복 공격(병인양요) |
📌 결론: 흥선대원군의 역사적 평가
✅ 긍정적 측면:
- 세도정치 철폐 & 개혁 추진 → 조선 왕권 강화
- 자주적 국방 & 외세 침략 방어 → 병인양요 & 신미양요 승리
- 호포제 & 사창제 개혁 → 조세 형평성 증가
❌ 부정적 측면:
- 지나친 독재 & 강제 정책 → 민심 악화
- 쇄국정책으로 근대화 지연 → 일본과의 힘 차이 확대
- 경복궁 중건 부담 & 경제 악화 → 백성 착취 심화
💡 흥선대원군은 개혁적인 인물이지만, 근대화를 준비하지 못해 조선이 일본과 서구 열강에 뒤처지게 된 원인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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